0. 들어가는 글
PC 게이머에게는 유명한 플랫폼이 있다. 마치 영상 플랫폼으로 제일 유명한 넷플릭스와 같은 플랫폼이다. 넷플릭스가 비디오 대여점에서 시작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플랫폼은 게임 제작사가 자사 게임의 네트워크 플레이를 개선하기 위해 만들었던 프로그램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은 네트워크 플레이는 물론 게임 판매와 설치, 버전업 패치 배포, 커뮤니티 형성, 모드 공유 등등이 가능한 플랫폼으로 발전하였다. 그 이름은 바로 스팀이다.
오늘 스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스팀은 게임 제작사들과 유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고, 게임계에 르네상스와 같은 전환기를 가져다주었다. 지난번에 이야기한 [아메리칸 트럭 시뮬레이터]와 같은 게임 제작사도 과감하게 장기 프로젝트를 계획할 수 있게 해준 것도 스팀이 있어서였다. 얼마나 잘 정리해서 전할 수 있을지 미지수지만, 스팀에 대해서 대략적인 내용을 정리해서 전하고자 한다.
1. 한 게임 제작사의 놀라운 철학
게임에 대해서 예술이냐, 아니냐를 논하는 논쟁이 있기는 하지만 제작자들의 마인드와 사측의 마인드를 살펴보면 예술계의 모습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기는 한다. 무슨 이야기냐면 게임계에서는 "내가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들자"라는 부류와 "수익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게임을 만들자"라는 부류로 나눠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직접 만드는 "수공예"와 같은 느낌의 업종에서는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모습들이다. 대표적으로 요리가 있겠다. 주방장이 고집스럽게 지키는 맛의 비결과 같은 것이랄까? 게임계 역시 그런 경향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처음부터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몇몇 게임사들이 자신들이 만드는 게임에 대한 철학을 고집스럽게 지켜나가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이런 철학과 고집으로 많은 유저들에게 환호와 지지를 이끌어낸 블리자드가 대표적이다. 물론 오너가 바뀌면서 점차 그 철학은 퇴색되어 지금은 옛 명성이 빛을 바랐지만 말이다. 작년 수많은 사람들에게 서양식 RPG의 끝판왕을 맛보게 해 준 라리안 스튜디오도 있다. 이 제작사는 [디비니티] 시리즈를 통해서 꾸준히 제작 역량을 키워왔고, 그 모든 제작 역량을 투입해 [발더스 게이트 3]를 제작했다. 이 게임은 수많은 유저들에게 경의롭다는 평가를 받았다.
스팀을 제작한 곳은 게임 제작사 밸브 코퍼레이션이다. 이곳은 1인칭 슈팅 게임인 [하프라이프] 제작사로 지금까지도 총싸움 게임으로는 TOP을 자랑하는 곳이다. 이곳은 발매되는 게임들의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실제 아무리 제작기간이 오래 걸려도 자신들이 만족하지 않으면 발매하지 않는 곳이다.
이런 밸브 코퍼레이션은 자사 게임인 [카운터 스트라이크]의 패치 배포가 용이하고, 자사 게임들을 통합 관리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그때가 바로 2003년. 한참 한국에서는 월드컵 4강 신화의 여파에 취해 있을 때 밸브에서는 향후 게임업계의 흐름을 바꿀 프로그램 하나를 발매한 것이다. 그 플랫폼이 바로 오늘 소개하는 스팀이다. 이 스팀에 타사 게임을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ESD, 즉 전자 소프트웨어 유통망으로써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스팀은 후술하겠지만 게임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유저들은 열광했고, 자금이 말라 간판만 달고 있던 수많은 제작사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나중에 유저들은 게임이 스팀에 발매하냐, 안 하냐로 구매 여부를 결정할 정도가 되었다. 이에 다른 대형 게임 제작사들도 스팀과 비슷한 ESD를 개발해 배포했으나 스팀만큼의 영향력을 가져가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스팀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유저 친화적인 플랫폼인데 반해, 다른 플랫폼들은 기업의 입장이 더 많이 반영된 플랫폼인 것이다. 결국 지금은 자사 ESD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스팀에도 게임 발매를 하게 되었고, 콘솔 게임들도 스팀에 입점하기 위해 PC 버전을 내놓게 만들었다.
이런 것들이 가능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스팀을 개발한 밸브 코퍼레이션이 고집스럽게 자신들의 철학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완성도 높은 게임, 즉 유저들이 만족할만한 게임을 만든다는 그들의 신념과 철학이 스팀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이에 스팀은 어떤 플랫폼보다도 유저들에게 쾌적하고 만족할만한 플랫폼이 되었고, 그 결과 거대한 영향력을 가져 현재 게임계를 주름잡고 있다.
2. 스팀이 일으킨 게임계 르네상스
- 게임을 사 놓고 안 하는 문화가 생김
유저들은 밸스 코퍼레이션의 오너 게리브 뉴웰을 이렇게 부른다. 연쇄 할인마. 스팀은 최대 90%까지 게임을 할인해서 파는 파격적인 세일들을 자주 연다. [설날 세일], [봄 세일], [여름 세일], [할로윈 세일], [가을 세일], [겨울 세일]이 매년 정기적으로 열리는데 이중 공포 게임들을 주로 할인하는 [할로윈 세일]을 제외하고 전품목 세일을 한다. 그러면 최소 1%에서 최대 100% 세일이 진행되는데, 보통 최대 할인은 70%, 75%, 80%, 90%이기에 이것을 노리는 유저들이 많다.
평소 싸면 3만원, 비싸면 10만 원을 넘는 가격의 게임들이 1, 2만 원 혹은 몇 천 원 단위로 할인된 가격에 판매되니 유저들은 이 유혹을 이기는 것이 쉽지 않다. 여기에 주말마다 특정 품목들을 세일하고, 비정기적으로 장르별, 제작사별 할인을 꾸준히 진행해서 스팀을 켜면, 게임을 안 살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든다. 그러다 보니 스팀이 등장하면서 [게임을 사놓고 안 하는] 독특한 문화가 생겼다.
예전에는 게임 커뮤니티가 활성화 되지 않았고, 활성화되면서도 게임 가격이 상당하니 한번 구하면 꽤 오래도록 즐기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 정 구하기 어려우면 불법 복제 혹은 다양한 불법 다운로드 사이트들을 통해 게임을 구해서 즐기곤 했다. 그런데 스팀이 등장하면서부터는 오히려 불법 복제가 더 귀찮아졌다. 스팀 할인 기간에 맞춰 열심히 용돈을 모아둔 다음 내가 원하는 게임을 내가 원하는 할인 폭에 맞춰서 사면되는 것이다. 그러면 후에 패치도 알아서 해주고, 유저 모드도 쉽게 구해서 쉽게 적용시킬 수 있고, 한글화도 어렵지 않고, 라이브러리로 등록되면 언제 어디서 어떤 컴퓨터든 스팀 접속해서 다운로드하면 즐길 수 있다. 클라우드 연동도 시켜 놓으면 지난번에 한 세이브를 바로 불러와서 할 수 있기까지 한다. 불법으로 프로그램을 구하는 것보다 훨씬 이득인 것이다.
그러니 유저들은 더 스팀을 쓰게 되고, 스팀에 더 몰입하게 된다. 게임을 사 놓으면 언젠가 하겠지 라는 생각으로 "쟁여놓거나" 구하고 싶었으나 구하지 못한 게임을 구하면서 만족감을 얻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색다른 문화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도 있다. 예전에는 불법 복제로 구한 게임들을 주로 했기 때문에 [게임을 안 사서 한다] 였는데, 오늘날에는 [게임을 사서 안 한다]라고.
그런데 이렇게 할인해서 팔면 스팀과 게임사에는 과연 이득이 될까? 놀랍게도 할인을 하면 기적적인 판매율 증가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한 책에서 분석해 본 결과 75% 세일을 하는 경우 무려 1470% 판매가 증가되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정가제를 밀어붙이던 대형 제작사들 역시 지속적으로 게임 세일을 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현재 게임 가격을 상당히 낮게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 온라인 거래로 더 큰 이익을 실현하게 된 제작사
스팀 유저들은 종종 색다른 구매 패턴을 보여주기도 한다. 예전에 인기를 끌었던 게임이지만 대부분 불법 복제나 불법 다운로드로 구해서 즐겼던 게임이 스팀으로 발매하자 하지도 않을 거면서 구매하는 경우다. 올드 게임 유저들인 경우가 많지만, 이런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대항해시대 4 HD버전 리마스터]가 있다. 많은 유저들이 불법으로 즐겼던 이 게임은 스팀으로 발매하자 바로 사주는 것으로 지난날의 빚을 갚았다는 글들을 남겼다. 비록 돈에이라고 불릴 정도로 가격 폭리를 취하려는 코에이지만 이 게임 앞에서 유저들은 관대해진 것이다.
이런 것들을 보면 제작사 입장에서도 스팀의 등장은 굉장히 반가운 일이다. 게임 유통이 쉽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CD나 DVD의 경우 불법 복제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에 여러가지 방법들을 시도했지만 해커들의 꾸준한 해킹으로 이마저도 쉽지 않게 되었다. 뭐 스팀이 등장했어도 여전히 불법 다운로드가 있는 것을 보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스팀을 통해 게임 유통과 게임 설치, 패치 배포 등이 온라인으로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이에 제작사에서는 유통과 물류, 재고에 대한 비용 부담이 줄어들게 되면서 최대 수익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스팀에서 꾸준히 세일을 해서 이미 발매한 지 오래된 게임들도 계속 팔아주니... 제작사 입장에서는 굉장히 고마울 따름이 아닐 수 없다.
온라인 게임 배포가 되면서 새로운 게임 제작 문화도 등장하였다. DLC. 소위 다운로드 컨텐츠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물론 라리안 스튜디오처럼 이걸 잘 사용하지 않는 제작사들도 있는 반면, SCS 소프트웨어나 사기적으로 DLC를 많이 내기로 소문난 파라독스 인터렉티브 같은 제작사들도 있다. 이런 제작사들은 보통 전체 DLC 가격이 원본 가격보다 훨씬 높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유저들의 원성이 자자한 경우도 많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DLC를 통해 제작비를 꾸준히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득이라지만 구매하는 입장에서는 끊임없이 부담을 강요받게 되는 것이라... 그래도 게임에 대해 애정이 있고, 즐기는 유저들은 흑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사는 편이다. 이 DLC가 있고 없고에 따라 게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세일기간에 맞춰서 하거나 자신에게 필요 없는 DLC는 사지 않는 현명한 소비를 하기도 한다. 암튼 이렇게 다양한 판매 방향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제작사들의 수익이 증대되면서 제작 여력이 약화되어 사라진 게임들도 다시금 개발되어 판매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경우 많은 유저들이 추억을 잊지 못하고 구매해서 다시금 사랑받고 입소문이 나 다시 뜨는 경우들도 생기곤 한다. 이런 문화를 통해 제작사는 더 많은 수익을 내게 되고, 그 수익으로 양질의 게임을 만드는 선순환이 생기게 된 것이다. 물론 이를 악용하는 경우들도 적지 않지만 말이다.
- 인디게임계의 발전과 활성화
[스타듀 밸리]는 1인 개발자가 만든 게임이다. 소위 인디게임인 것이다. 스팀에서는 많은 인디게임 제작사들이 만든 기발한 아이디어의 게임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스팀 자체에서 인디게임에 대한 제작도 장려하고, 이런 게임들에 대해 소개하는 프로그램들도 많이 개발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앞서 해보기"라는 것으로 게임을 소개한다. 이 경우 정식 발매는 되지 않았고, 현재도 개발 중이지만 유저들에게 선공개를 하는 것을 말한다. 구매해서 플레이해 볼 수 있고, 원한다면 제작자에게 직접 피드백을 전달하여 게임 개발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스타듀 밸리] 역시 이렇게 개발된 게임이다.
인디게임이 굉장히 많이 알려지면서 사실 게임 문화 자체가 좋게 발전한 것도 있다. 대형 제작사에서는 제작 기간과 수익을 생각했을 때 거대 프로젝트에 매달리게 되어 관심도 가지지 않는 게임 아이템들을 구현해서 내놓는 경우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발한 게임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꾸준한 업데이트와 소통을 통해 거액의 수익을 가져가는 경우들도 있다. 그리고 처음에는 인디게임 제작사였지만 점차 발전하여 어엿한 게임 제작사로 성장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토양을 스팀에서 제공해 준 것이다.
유저들 역시 예전에는 제작된 게임을 그저 플레이하는데 그쳐야 했다면 게임이 제작되는 과정에 적극 참여할 수 있으니 서로에게 이득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완성된 게임에는 손을 대기 어려운 반면에 개발 중인 게임이라면 얼마든지 수정과 발전을 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유저들도 관심을 가지고 이런 게임들을 사서 플레이한다. 서로에게 좋은 문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지금도 수많은 1인 혹은 소규모 인디게임 제작자들이 스팀에 자신의 작품을 업로드하고 유저들과 소통하며 개발을 해나가고 있다. 이들의 열정에 많은 유저들이 응원해주고 있으며, 더 다채로운 게임들이 등장하여 게임계를 풍성하게 해주고 있다.
3. 나가는 글
물론 스팀의 모든 면이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업계 1위 플랫폼임에도 불구하고 유저 친화적이며, 아직도 스팀에 대체할 수 있는 플랫폼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만 본다면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제작사는 물론이고, 플랫폼을 운영하는 밸브 코퍼레이션 역시 큰 수익을 얻고 있으며, 유저들 역시 편리하고 쾌적한 환경 속에서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모두에게 윈윈인 플랫폼은 아마 이 스팀 외에는 없을 것 같다.
지금은 스팀덱이라는 휴대용 게임기도 개발해서 판매하고 있으니 이들의 사업 확장은 어디까지 이루어질지 궁금하다. 어떤 면에서는 이들의 독점이 유저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이 독점은 계속 이어지지 않을까 한다. 스팀이 가져온 게임업계의 변화는 긍정적이었으며, 앞으로 게임업계와 문화를 선도하는 이들의 도전은 어떤 것이든 유저 친화적일 것이라 믿는다. 그런 이들의 긍정적인 도전을 응원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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