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는 글
일이 많은 하루였다. 이처럼 일이 많을 땐 성경책을 펴는 것조차 쉽지 않다. 요즘에는 핸드폰이 있어서 꼭 성경책이 아니라도 성경을 읽을 수 있어 좋다. 가지고 다니는 것이 간편하다는 것이지 늘 시간이 난다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없더라도 쥐어 짜야만 읽을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
인도에 있는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들과 만남이 어렵다는 이야기. 그런데 그분이 내게 지혜로운 말을 주셨다. 그 이유는 우리가 나이가 들면서 책임이 점점 더 많아져서 그런 것이라고. 무릎을 치며 그 말이 맞다고 하고 내 상황과 처지를 생각했다. 벌써부터 아이를 책임져야 하기에 해야 할 일들을 만들고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나를 보게 된다. 시키지 않아도 하게 되는 일들이 있고, 누군가 점검하지 않아도 그 일들을 해야 하는 상황. 그것이 책임을 다하는 사람의 모습 아닐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불편하거나 나를 힘들게 한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힘쓰고 애쓴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보다. 예전이라면 불평불만하며 쉽게 꺾이고 했을 마음도 좀처럼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고 해내고 있다. 오직 사랑하는 이를 위한 노력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토록 큰데, 내 아내에게는 그러지 못했구나 라는 생각이 방금 들었다. 글이란 것은 참 좋다. 써 나가며 생각을 다지고 돌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이 본격적으로 선민을 위해 역사하시는 내용이 담겨 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내용 그대로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와 노력을 엿볼 수 있는 장인 것이다. 그 여정이 이제 시작된다.
1.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13.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출 3:13-15, 개역한글
야곱의 가족이 애굽에 들어간 후 4대가 흘렀다. 모세는 딱 4대손이란 사실을 볼 때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한치도 틀림없이 그대로 이루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이 지난 후 요셉마저 죽고 만다. 이후 요셉에 대해 모르는 파라오는 야곱의 가족들을 핍박하기 시작한다. 파라오의 정책으로 이들은 점점 더 힘든 삶을 살아가고 이들의 고통스러운 기도를 들은 하나님은 약속을 이룰 때가 되었음을 알고 역사하시기 시작하신다.
4대가 지나가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었던 것 같다. 모세의 질문 역시 이에 대한 질문이었다.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하냐는 질문 말이다. 애굽, 이집트의 상황을 보면 이런 질문은 쉽게 이해가 간다. 모래사막이 둘러싸고 나일강을 중심으로 거대하고 푸른 농경지를 가진 나라 이집트. 고대사회에서 이집트는 낙원의 세계였을 것이란 분석이 있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믿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우상이었다. 파라오는 이 신들과 동일한 존재로 묘사가 되었다. 이곳에서 오래도 살지 않고 단 4대 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게 된 것이다.
필자를 기점으로 4대조 할아버지를 생각한다면 구한말에 살아가시던 것을 생각하게 된다. 할아버지가 일제시대에 태어나셨으니 증조할아버지는 구한말 정도에 태어나시지 않았을까 한다. 그럼 고조할아버지는 조선시대 말 정도에 태어나시지 않았을까? 까마득하고 먼 시간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볼법한 시간이고, 지금은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시대이다.
이 긴 시간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철저히 가르치지 않았다면 잘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모세라고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모세는 심지어 이집트 공주에게서 자랐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을 소개한다는 것은 굉장히 막막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질문에 친절히 자신을 소개하신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주신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을 소개해주신다. 그것은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라고 자신을 소개하셨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스스로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안 계신다. 모든 생명체는 부모가 있고, 부모와 같이 자신을 지은 무언가가 있는데 반해서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것이다.
우리가 신앙을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본 적은 없다. 왜냐하면 신앙의 목적이 나의 요구를 얻기 위한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요구를 들어주는 대상은 누구든 상관이 없다. 그저 내 요구를 잘 들어주는 소위 용한 존재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신의 뜻대로 살아 더 큰 복, 신이 약속한 복을 받겠다고 신앙의 태도를 정한다면 내가 가르침을 얻고자 하는 신에 대해서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제 하나님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가지고 알아봐야 하겠다.
2. 약속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19.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의 가기를 허락지 아니하다가
20.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21.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찌라 너희가 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22. 여인마다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우거하는 자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 자녀를 꾸미라 너희가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리라
출3:19-22, 개역한글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책임감? 아니다. 창조력이다. 사람과 달리 하나님은 세대를 넘어 먼 훗날에 있을 일을 약속하시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이 있다.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그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으로 "처녀에게서 낳은 아이"를 일러주셨다. 사실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순 없다. 누구나 다 그리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일을 하셔야 했고, 창조주 하나님은 이 일을 이루셨다.
하지만 사단은 이렇게 하지 못한다. 우리가 종종 농담삼아 하는 이야기가 있다. 신통력이 없는 무당이 집 마당에 대추나무가 있냐 물어보고, 주인공이 없다고 하자, 있었으면 당신은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 말이다. 정말 그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당이 모시는 신은 창조력이 있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미래의 일들에 대해서 맞추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소위, 미래의 일을 맞추는 것이지 미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차이는 굉장하다. 사단은 창조주가 아니기에 무당이 모시는 신처럼 미래의 일을 맞출 뿐이다. 약속을 이루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했던 약속을 다시금 모세에게 자세히 일러주신다. 아브라함과 달리 모세는 현재 애굽 왕의 지배를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끌어야 하는 현실에 놓여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과 달리 좀 더 자세하게 상황을 이야기하시며 모세를 이해시키실 수 있으셨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브라함의 약속을 상기시키심과 동시에 좀 더 자세하게 상황들을 설명해 주신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상황들을 바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행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물론 궁금한 것들도 물어보면서 말이다.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출 4:21-23, 개역한글
모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바로에게 가서 이야기할 것을 일러주신다. 그전에 먼저 상황을 설명해 주신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란 것이다. 그럼에도 지시한 대로 기적을 행하고 이야기를 하라고 명하신다. 그 이야기는 간단하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이기에 이들을 놓아주고 나를 섬기게 하라. 안 그러면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겠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나중에 보면 바로에게 베푸신 10가지 재앙의 마지막 재앙을 통해 실제로 이루어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식언하는 일이 없다고 하셨는데(민 23:19, 사 55:11) 위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니 정말 무서운 말인 셈이다.
우리가 성경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그냥 적혀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이루어진다. 그래서 그 이루어지는 말씀들을 알아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저주를 받지 않고 복을 받을 수 있기에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하는 모습을 돌아봐야 할 때가 아닐까 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애굽으로 가게 된다. 그는 정말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선지자였다.
3. 선지자를 원망하는 사람들
19.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이 너희의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줄 알고
20.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선것을 만나
21.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출 5:19-21, 개역한글
하나님의 명을 받고 바로를 만난 모세와 아론. 바로는 모세의 말을 듣고 화를 내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괴롭게 만든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책망한다. 이들이 하나님의 명을 받고 왔으나 오히려 하나님이 이들을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진정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자신들의 생활을 오히려 어렵게 한 모세와 아론이 원망스러울 뿐인 것이다.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메시아를 보내주신다고 하셨을 때 이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마치 다윗처럼 잘생기고 용맹하며 자신들을 규합하여 주변 나라를 정복하는 그런 메시아를 꿈꾸지 않았을까?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메시아를 보내고자 하심이 아니셨다. 예수님은 인생의 질고를 아시는 분이셨다. 목수였고, 가난한 지방인 갈릴리에서 머무셨다. 활동하시는 모습을 보더라도 병자를 고치고,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려고 노력하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먹을 것을 좇아 예수님께 모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이를 예수님도 알고 계셨다. 심지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례들을 볼 때 우리는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있는가? 하나님은 어떤 생각을 하시고, 무엇을 바라시는지 알고 있는가? 만약 예수님이 다시 오셨을 때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님이 스스로를 예수님이라고 해도 당신은 예수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싸울 것인가? 내가 보기엔 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다.
이런 일들은 단지 오늘날만의 일이 아니다. 모세와 아론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꺼내려고 하는 그 순간에도 있었던 일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안위와 세상에서 얻는 이익이 더 중요했다. 우리는 어떠한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4. 나가는 글
생각해 보면 우리는 지금까지 신앙을 하며 기준을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을 해봐야 한다. 목사님에게 기준을 두었는가? 아니면 성경 말씀에 두었는가? 아니면 하나님에게 두었는가? 어디에 두었냐에 따라 우리의 신앙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신앙을 한다고 하면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경에 대해서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자식에게는 공부하지 않는다고 타박하면서 정작 자신이 복과 저주를 놓고 선택해야 하는 중차대한 문제에서는 감으로만 판단하려고 한다면... 자식에게 공부하라는 소리를 아무리 해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뭐라 할 말이 있을까? 자기를 닮아 그런 것인데...
그러니 우리는 모르는 것, 오해하는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성경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 결과는 이제부터,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순간부터 너무나 달라지기 시작한다.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과 바로가 다른 결과를 맞이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도 모세를 따라 나오는 자와 애굽에 남는 자의 결과는 너무도 다르다. 이들이 한 선택은 정해져 있었을까? 하나님이 바로가 결코 이스라엘 백성을 놔주지 않을 거라 하신 이유는 바로를 그렇게 창조하셔서 그런 것일까? 그럼 바로는 태어나기 전,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그 순간에 이미 하나님에게 대적하라는 운명으로 만들어졌다는 소리일 텐데... 어떤 부모가 자기 자식을 낳으면서 이 아이는 우리 돈줄이야 이러면서 자식을 낳고 기르는가? 그런 인륜을 저버린 부모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 심정이 아닐까? 모든 선택은 인간이 하는 것이고, 인간의 욕심으로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뜻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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