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 담긴 이야기/최근 본 영화 감상

[#분석] 듄2 - 디스토피아로 달려가는 스페이스 오페라

제시안 2024. 3. 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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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안에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이미지 출처 : 구글

 

0. 들어가는 글

 

2월 28일, [듄 2]가 개봉하였다. 1편을 아이맥스로 보지 못한 아쉬움을 잊지 못하고 2편만큼은 아이맥스로 보리라 다짐을 한 결과, 시간이 꽤 지나서 아이맥스로 보게 되었다. 눈 가득 담기는 모래의 땅 아라키스의 모습과 숨을 쉴 수 없이 몰아치는 이야기. 그리고 폴과 챠니의 감정선이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고 전달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도 감독의 연출력에 찬사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반지의 제왕]이 나온 이후 놀라운 대서사시 영화를 만나기 어려웠었는데 이 영화는 그 정점에 도전하는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영화는 원작 소설에서 다룬 주제인 "정치 + 종교 + 영웅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아내고자 하는 노력이 곳곳에 보였다. 그래서 지인들과도 이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쉽게 나올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한편으로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나 [1984]가 떠올라서 다른 의미로도 흥미를 전해줬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영화는 정말 명작이고, 꼭 소장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듄 1] 역시 블루레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이번 글에서는 이 영화에서 다룬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원작팬이 아닌지라 영화 내에서 너무 함축되고 변용된 부분들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점을 참고해주시기 바란다. 

 

1. 예언

※ 이미지 출처 : 구글

 

영화에선 종교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1편에서부터 이어져 오는 갈등 중 하나는 주인공인 폴이 듄 세계관 속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종교 베네 게세리트가 예언한 퀴사츠 해더락이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폴의 어머니 제시카 아트레이더스는 베네 게세리트의 대모의 뜻을 거스리는 일까지 저지르고 아라키스에서 아트레이더스 가문이 몰락했을 때 끝까지 살아남는다. 

 

문제는 예언이라는 것인데... 영화 내에서 이 예언은 다음의 특징을 가진다. 1) 꽤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왔다. 2) 베네 게세리트에서는 이 예언을 이루기 위해 굉장한 노력을 한다. 

 

퀴사츠 해더락의 존재의 필요를 예언이라는 것을 통해 이어져 내려오는 것인지, 사실 불분명하다. 하지만 이를 이루기 위해서 베네 게세리트는 굉장히 비인륜적이고 고도로 정치적인 조직을 만들어 이끌어간다. 각 구성원들은 이 예언을 이루기 위한 말이고, 이를 알게 되는 순간은 굉장한 고통을 안겨주는 것 같다. 자신의 존재가 고작 버려지는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예언은 모래의 사막과 같다. 생명이 없고 모든 것을 매마르게 하며 결국 멸망과 불행에 이르게 하는 결과물로 남게 된다. 이는 2부에서 핵심으로 관통하는 주제로 보인다. 

 

본격적으로 프레멘들에게 속하게 된 폴. 하지만 그의 행적은 남부 프레멘들이 숭배하는 종교의 메시아와 행적이 겹치는 양상을 보인다. 이에 스틸가는 열정적으로 폴이 그들이 말하는 예언적 존재라고 퍼뜨린다. 하지만 폴은 그런 것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리고 자신이 환상대로 움직이게 될 경우 나타나게 될 재앙에 대해 고민하며 그 운명에 저항하려고 노력한다. 이를 프레멘인 챠니도 지지하지만 결과적으로 남부에 가게 되고 생명의 물을 마시게 되며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인다. 스탈가는 물론이고 그 어머니 제시카의 의지로 말이다. 

 

생명의 물을 마시고 본격적으로 퀴사츠 해더락의 길을 걸어가게 된 폴은 하나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가 보고 있는 미래라는 것은 절망만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 말미에서는 대가문들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 아라키스를 떠나는 프레멘들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사람들은 광신적으로 예언이 이루어졌다며 그 예언이 준다는 결과를 얻기 위해 떠난다고 하지만... 과연 그것은 행복일까? 아니면 불행일까?

 

 

2. 광신적 태도는 누굴 위한 것인가?

※ 이미지 출처 : 구글

 

사막이라는 배경, 베두인족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 프레멘. 광신적일 정도로 종교에 집착하는 프레멘들의 생활태도. 그리고 근본주의자들. 이 모든 것들을 보면 아랍세계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아라키스에서 채취하는 광물인 스파이스는 중동에서만 나는 황금을 낳는 거위, 석유를 떠올리게 한다. 이 석유를 놓고 벌이는 첨예한 갈등이 그대로 영화 내에서 보이는 것 같다고 하면 이상할까?

 

이 영화에서 주된 갈등으로 떠오르는 예언 이라는 것은 중동이라는 세계를 바라보는 부정적 시각을 대표하는 단어가 아닐까 한다. 이들의 광신적 근본주의적 태도는 서양에서 다루기 까다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보면 서로 종교적 이유로, 정치적 이유로 이합집산한 모습은 종교성이나 선의의 정치나 이런 것이 아니라 몇몇 권력욕에 사로잡힌 이들의 절묘한 정치적 술수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영화에서도 지적하고 있다.

 

종교가 고도의 정치성을 띄기 시작하는 것은 사람의 말이 섞이면 서다. 이것은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사상 역시 마찬가지다. 대표적으로 공산주의가 있다. 공산주의는 모든 인민을 위한다는 이야기로 스탈린이라는 최악의 독재자를 만들고, 지금의 시진핑과 북한의 김 씨 3대를 만들지 않았는가? 사실 공산주의라는 내용만 본다면 이런 독재자들의 면모는 찾아볼 수 없다. 공산주의라는 사상에 기대어 자신의 말들을 치장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성경에서도 이사야 29장에 이런 사실이 그대로 기록되어있다. 성경을 주고 읽어보라 하니 아는 사람은 봉해져서 모른다 하고, 모르는 사람은 내가 몰라서 모른다고 답한단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말과 교훈만을 배우고 가르치며 말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고 한다는 것이다. 

 

베네 게세리트를 대표로 듄에 나오는 종교는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전래되어 내려오는 지식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의지해서 전달되는 굉장히 원시신앙적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 사람이 진정 신의 말을 전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말을 전하려는 것인지에 대한 객관적 판단을 하기 어렵다. 문제는 그가 전한 말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사람들은 이 자가 말을 한 것이 이루어지니 그를 전적으로 믿기 시작하는데 여기서 권력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권력은 사람이 많아질수록, 조직이 구체적으로 잡힐수록 고도화되어 마침내 독재를 할 수 있는 여건으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원작자는 이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고, 폴은 이런 것을 두려워하여 고민을 하며, 챠니는 그런 폴이 종교성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만 결국 이루지 못하게 헤어지게 된다. 프레멘들의 예언을 따라, 베네 게세리트의 예언을 따라 폴은 무앗딥, 퀴사츠 해더락이 되고 만다. 아라키스를 점령하면서 그는 이미 수많은 광신도를 이끌게 되었고, 대가문들을 정복하러 기꺼이 떠나게 된다. 

 

결국 폴은 어떻게 될까? 독재자의 또다른 이름, 곧 황제가 될 것이다. 그것이 마치 영광인 것처럼...

 

3. 신의 예언은 사랑과 화평을 가져다준다

※ 이미지 출처 : 구글

 

베네 게세리트의 독특한 특징은 "신"이란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 기억이 이어져 내려온다는 특징은 결국 무당의 그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무당은 "신"을 모시는 이인가? "귀신"을 모시는 이인가? 분명한 것은 무당이 모시는 "신"이란 존재는 이 세계를 창조한 이는 아니란 점이다. 그 존재들은 분명한 처음이 있다.

 

이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기독교 성경은 예언과 성취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하고 다시 이룬다고 하신 약속에 대해 전하며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에서는 독특한 이단적 징후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성경을 멀리하게 하고, 또 하나는 성경 속 내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의 메시지에 단연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의문을 성직자에게 전하게 되었을 때 믿어라, 질문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을 함부로 해석한다 등으로 면박만 준다면... 혹은 어떤 집단에서 자신을 메시아처럼 숭상하게 하고 성경이 아닌 다른 글을 읽게 하며, 성경의 내용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전하는 경우. 이 경우도 집단 구성원들에게 파멸을 초래하는 최악의 참사를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 성경은 굉장한 정화의 도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가르침을 공론화하고, 이 가르침으로 권력 구도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창조주에 대한 면밀한 소개와 믿을만한 근거를 제시하고 창조주가 바라는 인간상을 제시하여 그 인간상에 닿도록 모두가 노력할 수 있게 하는 가르침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것만 본다면 좋겠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오래도록 봉해져 있었고, 그래서 기독교 역시 베네 게세리트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성경 속에서 약속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눈물과 고통과 아픔을 씻어주는 사랑과 화평의 세계다. 이를 초대 기독교에서는 이루었고, 서로가 내것 네 것 할 것 없이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핍박과 환란을 참아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파했다. 마르크스는 이런 초대 기독교에서 영감을 얻어 공산주의 선언을 한 것이라 밝히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런 가르침을 이룰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언하면 이루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람은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이루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결국 베네 게세리트가 채우지 못한 빈 공간, 그리고 원작자가 알지 못했던 그 미지의 영역.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도 하나님의 사랑도 알지 못한 결과 사람의 생각과 이기심이 가득 차 파멸로 이끌리는 비극적 디스토피아 이야기가 펼쳐지게 되었다. 폴은 결국 황제가 되겠지만 그의 손에 묻은 수많은 사람들의 피는 과연 어떤 의미로 남을 것인가? 그것이 사랑인가? 생명인가? 평환가? 남는 것은 파괴와 죽음 밖에 없지 않은가?

 

여기에 폴의 고민과 주저함이 있었다. 그가 인간이라는 것. 그는 결국 불행을 가져올 것이란 점.

 

 

4. 마무리

※ 이미지 출처 : 구글

 

운명이 있다면 사람에게 자유의지는 왜 필요한 것일까? 이것은 오래도록 사람들이 고민하던 것이다. 어쩌면 [듄 3]에서는 이런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한다. 폴은 퀴사츠 해더락이 되어 모든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결과 자신의 선택은 아무것도 없이 그 운명에 휩쓸려 갈 뿐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절망감은 얼마나 클까? 자기 앞에서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가 나중에 자신을 배신하고 결국 자기 손에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 그것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할 때. 그때 겪게 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 신이 배제된 체 사람의 욕망으로 이루어진 예언과 성취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예언과 성취를 모르는 이들이 보는 디스토피아. 그 모래 먼지 가득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세계의 축소판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정말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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