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 안에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0. 들어가는 글
꽤 오래전에 개봉해서 흥행한 영화, [황산벌]. [왕의 남자]로 이름을 알린 이준익 감독의 작품이다. 이미 여러 차례 본 영화이지만 최근에 또 기회가 생겨서 영화를 보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최대한 감독의 의도에 따라 각색되고 의도적으로 비꼬아 만들어진 부분들. 가벼운 코미디 영화로 처음 생각했지만 보면 볼수록 담고 있는 메시지는 무겁고 진중했다.
1. 삼국시대와 사투리가 만난 발칙한 상상력
평안도 사투리와 전라도 사투리. 그리고 경상도 사투리. 실제 삼국시대 때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의 말을 배웠을까? 지금도 들으면 무슨 소린지 모르는 그 말들을 당시에는 또 어떻게 알아듣고 소통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영화 전반에 깔려있다.
고구려는 평안도 사투리, 백제는 전라도 사투리, 신라는 경상도 사투리를 하는데 여기에 당나라는 중국말을 하면서 현장감을 살렸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주연 배우들의 사투리 연기는 필수. 명품 배우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들이 사투리의 맛을 잘 살렸다.
이 사투리 덕에 생기는 애피소드도 있다. 백제에서 작전회의를 할 때, "거시기할 때꺼정 머시기를 거시기혀라"라는 평범한 문장을 전해 들은 신라 간첩. 하지만 이 거시기가 무엇인지, 머시기가 무엇인지 도통 알 턱이 없다. 이것은 대략 서로가 공유하고 있는 정보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한국어의 특성을 잘 나타낸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이것 외에 서로 이야기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어 보여서 좀 아쉽기는 했다.
사투리라는 것만 잘 표현이 되었음에도 우리는 각 지역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나 특성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표준어로 획일화된 모습들에서 벗어나 각각의 개성들을 돋보이게 하려는 감독의 시선도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사투리 덕분에 우리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인간의 정, 따뜻함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제는 점차 지방에서도 사투리를 듣기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이다. 사투리는 과거 우리 지역 사람들의 정체성이었는데 현대 문물의 발달과 빠른 교류로 점차 퇴색되어 가는 것이다. 이런 옛 감성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옛 감성의 상실과 함께 인간성이 점차 상실되어가고 있는 현대사회에 대한 묘한 비판을 엿볼 수 있었다.
2. 기록된 역사와 실제 현실에 대한 물음
이준익 감독의 잊혀져 가는 것들에 대한 향수는 영화를 꿰고 있는 메시지와 함께 더 크게 작용한다. 최근까지도 한국 사극은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 속에서 일반 백성들은 평범한 약자이며 역사를 주도해 가는 것은 한 나라의 권력의 정점에 선 남성들이 전개해 나간다. 이들은 나라라는 큰 가치를 위해서 많은 것들을 무자비하게 희생하기도 하는 존재들이다. 실제 영화에서도 계백은 자기 가족들을 죽이고 출정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전쟁이란 한 장군이 치르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병사들이 실제로 부딪혀 싸워 승리를 얻어내는 것이 전쟁이다. 여기서 간극이 생긴다. 실제 전쟁을 통해 이득을 얻는 것은 전쟁터에 직접 참가하지 않는 권력자들이다. 반면 전쟁터에 직접 참가한 사람들은 이득보다도 생존에 더 급급하게 된다. 황산벌에서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김유신 장군은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된다. 일반 병사들에게 전쟁 승리의 명분이 명료하게 서지 않고 전달되지 않은 가운데 어떻게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싸울 것인가 고민하는 장면에서 잘 나타난다.
영화는 곳곳에 실제 병사들과 지도자 계급의 간극을 잘 보여준다. 계백과 김유신이 만나 장기를 두며 서로를 떠보는 장면에서는 장군들이 움직이는 말에 따라 실제로 병사들이 장기 말이 되어 서로를 죽이는 장면을 보여준다. 바로 앞에 병사가 서 있는데 그 병사가 나를 죽일지도 모르는데 그저 장군의 명에 기다려야 하는 병사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서사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화랑 반굴과 관창의 영웅적인 전사 역시 다른 시각에서 재조명하여 큰 울림을 주었다. 아직 청소년에 불과한 두 화랑이 어른들의 강요에 못 이겨 나가 싸우고 전사하는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던 고정관념에 큰 변화를 주기에 충분했다.
실제 이런 감독의 시도는 계백의 전설적 설화에서도 등장한다. 5천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 나서기 전 자기 가족들을 죽이고 출정했다는 계백의 신화. 감독은 아내의 입을 빌려서 그 설화가 가지고 있는 폭력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자신의 이름을 위해 가족을 희생시키는 계백의 모습은 삶보다는 개인의 명예와 욕심에 초점이 맞춰진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황산벌 전투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를 깨달은 계백이 거시기에게 살길을 내어주는 모습은 이준익 감독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3. 정치에 대한 신날한 비판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다. 클라우제비츠가 한 이 명언은 전쟁에만 포커스가 맞춰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손자병법]에서도 전쟁을 치르기 위해선 국가단위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국력은 물론 전쟁에 대한 당위성, 그리고 내부적인 단결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이미 당나라와 약속을 하고 백제나 고구려를 치겠다고 마음 먹은 신라. 사분오열되어 나라가 망하는 가운데 서로 살길만 찾고 있는 백제. 서로 다른 정치적 상황에서 전쟁을 시작하는 김유신과 계백의 처지는 다르다. 계백은 어떻게든 자신들이 황산벌에서 시간을 끌어야 하는 입장이고, 김유신은 어떻게든 황산벌을 빨리 돌파해서 당나라군에게 보급물자를 가져다줘야 한다.
영화는 줄곧 김유신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당나라가 정한 약속의 날은 다가오는데 강력하게 자리에 선 백제 결사대를 뚫고 가기에는 너무나 큰 희생을 치뤄야 한다. 계속 재촉하며 압박하는 신라 조정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당나라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달래는 김유신은 다른 전쟁을 또 예견하고 있기에 쉽게 전진하지 못한다. 문제는 이 속에서 일반 병사들에 대해서는 어떤 시선도 느껴지지 않는다. 즉 정치적 입장에 선 자들에게 일반 병사들은 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인식은 김유신 장군이 계백을 만나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 드러난다. 정치를 알지 못하면 병사들을 다 죽인다는 말을 통해서 말이다. 이는 단지 명을 우직하게 지켜내는 것을 넘어서서 장군의 입장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넌지시 일러주는 말이었다. 하지만 계백은 그 말을 일축해 버린다. 이미 각 나라의 상황이 다른 입장에서 김유신의 조언은 그저 항복하라는 말로만 비춰지기 때문인 것이다. 아마 영화 속에서 김유신은 그런 의도로 전했을 것이지만, 관객에게는 전혀 다르게 들렸을 것이다.
결국 이 영화에서 김유신도, 계백도 지도자들의 욕심에 희생되는 존재들이다. 다만 정치적 역량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로 둘의 결과는 나뉘었을 뿐이다. 김유신은 결국 최대한 병력을 지켜서 약속한 장소에 도착한 것으로 나온다. 신라 병사들의 고군분투와 희생은 지도자들이 신경쓰는 대목이 아니다. 그저 약속한 시간에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그에 따른 처분만 있을 뿐이다.
4. 마무리
2003년 개봉한 영화이지만 오늘날 봐도 영화가 주는 감동이 크게 다가온다.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 내내 자리하고 있는 메시지가 개그적 요소로 뒤덮어도 사라지지 않고 진한 여운을 주기 때문 아닐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극은 변함이 없고, 한국 정치도, 국제 정치도 달라진 것이 없다. 서로를 헐뜯고 자기 욕심부리기에 바쁜 가운데 일반 시민들은 끊임없이 희생되고 있다. 그 결과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지만 이 역시 남일에 불과하다. 그저 숫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언제 사람을 위한 정치, 사람들이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세상이 이루어질까.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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