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 담긴 이야기/최근 본 영화 감상

세상은 진정한 나를 봐줄 수 있는가? - [알라딘]

제시안 2019. 7. 8. 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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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0. 들어가는 글

  

※ 이미지 출처 - 구글

  나는 누구일까? [지킬박사와 하이든]에서는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을 폭력적으로 그린다. 그것은 미지의 존재이고 나는 알 수 없는 나의 모습이다. 심지어 다른 인격을 가진 것 같은 그런 존재 말이다. 내가 제어할 수도 없고 내가 케어할 수도 없는 이유는, 나는 그 존재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만나는 사람들은 오직 외부에서 나를 접촉하는 누군가 이다.

 

  이런 나의 모습을 느낄 수는 있다. 때로 내 다른 모습으로 나 스스로도 괴로워지는 경우도 있다. 사실 위에서 한 말처럼 단정 지어서 설명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꽤 많은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현대에는 더더욱 말이다. 나라는 사람에 솔직할 수 있었던 시대와는 달리 현대는 그렇게 단순한 삶을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페르소나. 이것이 문제다.

 

※ 이미지 출처 - 구보

  1992년에 개봉했던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 [알라딘]. 2019년에 실사 영화로 돌아왔다. 어릴 적에 애니메이션으로 봤던 주인공들이 실제 배우들로 등장하고, 흥겹게 들었던 명곡들을 다시 듣게 되니 어린 시절 감수성에 흠뻑 빠지게 만들어주는 훌륭한 작품이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질문, 진정한 나의 모습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는 것인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집중해보자.

 

1.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검은머리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라고 했던가? 이는 사람 속은 그만큼 알 수 없고, 아무리 정성을 쏟아도 쉽게 등 돌리는 사람의 속성을 두고 한 말이다. 욕도 이런 욕이 없지만은 그만큼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사람들이 마침내 쏟아내는 한탄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속을 안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고, 이를 알고 내 마음껏 그 사람을 움직인다 할 것 같으면 대업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마치 삼국지의 유비처럼 말이다.

 

  알라딘도, 자스민도 고민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몰라주는 주변의 상황이다. 알라딘은 선한 마음을 가지고 선행을 베풀어도 좀도둑이고, 가난한 거렁뱅이이다. 이런 알라딘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를 결정하게 만든다. 아무리 오해라고 변명을 해도 이는 들어 먹히지 않고, 사람들의 선입견 속에 갇혀서 결국 그 선입견대로 하게 되어 버린다. 자스민 역시 공주라는 자신의 신분에 의해 자신의 능력은 늘 평가절하 당해야 하는 상황 속에 놓여 있다.

 

  이런 둘의 만남을 두고 바로 운명적 만남이라 하는 것 아닐까?

 

※ 이미지 출처 - 구글

  왕자가 되어 자스민에게 나타나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세상을 구경시켜주는 알라딘. 자스민과 함께 부르는 [A Whole New World]는 신분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알라딘과 자스민의 열망이 같이 담겨있는 노래이다. 그래서 더 명곡으로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에서 늘 갈등을 겪고 있다. 사회 생활을 할 때 제일 어려운 것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주변 사람들과의 교류가 적어지게 된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혹은 더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가족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등등.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점점 새로운 만남과 사람을 알아가는데 들이는 시간과 에너지가 없어지는 것이고, 그것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그렇다고 본다.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 하더라도 경험으로 축적된 데이터에서 사람들이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결국 그렇고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보이는 세계]는 처음 만났을 때 접하게 되는 그 사람의 정보들이다. 외형, 직업, 나이, 사는 곳 등의 객관적 데이터들과 말하는 태도와 지식의 수준, 그리고 행동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정보들을 빠르게 스캔을 하고 그것들을 통해서 이 사람은 나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가 체크를 해봐야 하는 것. 그리고 오래 만날 인연인지 아니면 잠깐 만나고 지나갈 사람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것. 이득 관계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는 참 피곤한 상황이 된다. 

 

  우리가 마주하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는 사실 서로 공개하기 껄끄러워 하는 것이다. 살아온 과정과 가정환경, 생각, 어떤 상황에 대해 느끼는 나만의 감정, 그렇게 느끼는 이유 등. 공개하기 껄끄럽기도 하지만 이를 알기 위해서는 굉장히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소위 공을 들여야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인 것이다. 이 세계로 접근하는 것은 쉽지 않고, 또 이 세계를 쉽게 내놓는 것은 얕보일 수 있는 문제이기에 주의해야 한다. 

 

  결국 우리 현대 인간관계는 무수히 많은 조언과 지적들에서도 이야기하듯 표면적인 만남들에 둘러 쌓여 버린 것이다.

 

  이때 비로소 등장하게 되는 것이 [페르소나] 이다.

 

2. "자아"라는 이름의 함정

  영화 [알라딘]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다 갇혀있다. 알라딘과 자스민은 신분에 갇혀있고, 지니는 램프에, 자파는 2인자라는 강박에, 왕은 자파의 마법에 갇혀있다. 이들은 서로가 갇혀 있는 상황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은 크지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요인은 정작 자신에게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어떻든 해결의 방법을 외부에서 찾았다. 현대인들이 우울하고 지치는 삶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마약과도 같이 하는 그것들. 게임, 영화, 로또 같은 그런 것들. 이 영화에서는 [마법의 램프]가 바로 그것이다. 

 

※ 이미지 출처 - 구글

  알라딘은 자신이 얻은 램프가 무엇인지 몰랐다. 이것의 용도도, 그리고 왜 그것을 얻어야 하는지도. 그런 알라딘이 지니에게 빈 소원은 바로 왕자로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왕자가 되어 왕궁에 갔지만 알라딘은 달라진 것이 없음을 알고 좌절한다. 왕자가 되면 왕자가 된 자신을 봐주는 것이었고, 거렁뱅이로 있으면 거렁뱅이가 된 자신을 봐주는 것이었다. 그속에 변하지 않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봐주는 이는 없었다. 이에 절망한 것이다. 그리고 지니는 말한다. 네 겉모습이 지금 왕자로 변했지만 네 속에 있는 너는 아직 거렁뱅이 알라딘이라고. 그리고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를 권한다.

 

  알라딘은 지니의 조언에 따라 자신에게 먼저 솔직해지기 시작하고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처하게 된다.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알라딘은 솔직해질 수 있는 자신이 있는 사람이었다. 반면에 자파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자파가 사로잡힌 권력은 자파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는 외부의 강한 무언가였다. 알라딘의 갈등은 내적 갈등인 반면 자파의 갈등은 외적 갈등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알라딘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내면을 봤다면, 자파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외부 환경을 본 것이다. 결과 알라딘은 자스민과 결혼하게 되었고, 자파는 램프의 요정이 되어 갇히게 되었다. 

 

  자파와 다르게 문제를 접근한 알라딘의 경우에는 사실 상황이 다르다. 그는 치열하게 외부 환경과 마주하는 자신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영화 초반에서 좀도둑이 되어 쫓기면서도 선행을 베푸는 그의 모습은 이런 치열함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영화 내내 이어지는 알라딘의 고민 역시 어느 한순간 상황이 변해서 생긴 고민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고민이었음을 알려준다. 이에 결정적인 순간에 지니의 조언을 들을 수 있었고, 자파에게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알라딘은 결국 어떤 답을 얻었을까? 그것은 신분이나 돈, 권력 등이 아닌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 아니었을까? 그것이 비록 남들 보여지기에는 부끄럽고 못난 나의 모습일지라도 말이다. 그랬을 때 비로소 자스민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알라딘이 찾은 것은 자신의 자아일까? 아니다. 비로소 자아를 찾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자아는 세계와 소통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페르소나의 개념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나를 정의할 수 있는 어떤 철학적, 종교적 논의가 사라지고 난 현대에 어떻게 자아는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다른 이들을 통해서 발견되는 '나'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어보고, 이 생각과 다른 나의 생각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내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럼 나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상황과 관계를 통해 끊임없이 나를 발견해갈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다른 사람을 통해 발견된 나라고 할 것 같으면, 사실은 원래부터 존재하고 있던 나라는 존재가 있었던 것 아니겠냐는 사고로 전환이 된다. 가려져 있고, 볼 수 없는 나의 모습, 즉 지킬박사와 하이든과 같이 나는 살펴볼 수 없는 나의 이면적인 모습을 타인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지킬박사와 하이든을 봤을 때 실제로 하이든을 마주하고 공포에 질리는 것은 지킬박사와 하이든을 품고 있는 나 아닐까?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지킬박사의 모습과 달리 하이든은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나의 이면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면으로 감춘다고 한들 가려질 수 있을까? 알라딘과 자파는 그 하이든을 보고 고민했던 것이고, 서로의 답은 달랐다. 알라딘은 그 하이든에게 손을 내밀었고, 자파는 그 하이든을 감추려고 노력하였다. 결과적으로 알라딘은 하이든을 길들일 수 있었고, 자파는 그 하이든에게 먹혀버리게 되었다. 

 

  알라딘은 지킬박사와 하이든을 모두 잠재우고 비로소 알라딘이 될 수 있었다. 비록 자신감 없이 비루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함에 절망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3. 최고가 되었을 때 바꿀 수 있다

※ 이미지 출처 - 구글

  애니메이션과 달리 자스민은 적극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너무 미미하다. 여성으로 등장했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주인공은 알라딘이고, 알라딘을 통해서 위기에서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해준 것도, 자파의 정체를 밝힌 것도 바로 알라딘이었다. 자스민은 알라딘이 없었다면 이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들어갔을 것이다.

 

  영화 마지막에 왕은 자스민에게 왕위를 건내준다. 여기까지 파격이긴 한데, 왕은 자스민에게 이야기한다. 왕은 법을 바꿀 수 있으니 네가 법을 바꿔 알라딘을 남편으로 삼으라고. 우여곡절 끝에 왕위를 얻은 자스민은 사실 꼭 알라딘이 아니어도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알라딘을 남편으로 받아들인다.

 

  최고가 되었을 때 비로소 바꿀 수 있다. 그 전에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고에 올라가는 과정에서 본래의 뜻은 사라지고 현실과의 타협, 그리고 내 욕심과 안위만 남게 된다. 이것이 한편으로 사회를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하다. 

 

  작가는 여성들에게 노멀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생각한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이 메시지에 씁쓸함이 느껴졌다. 아직도 나아가야 할 길이 많은 여성 인권을 생각하면 말이다. 여성이 결국 권력의 정점에 있어야 이 모든 문제들은 해결될까? 아니면 여성이 권력의 정점에 서도 결국 다른 사람들처럼 무너지고 말 것인가? 그것은 모를 일이다.

 

  자스민은 국익을 위해 다른 나라 왕자를 만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찾게 해 주고, 자신에게 힘을 얻게 해 준 옛 연인을 버리지 않았다. 이것 역시 단지 주인공이니까, 해피엔딩을 위해서, 이렇게만 볼 수 있을까 싶다. 다르게 본다면 옛날의 순수함을 잃지 말라는 조언으로도 비춰진다. 우리가 쉽게 잃어버리는 그 옛 열정과 순수함을 현실과 타협한다는 핑계로 잃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있는 것이다. 

 

4. Who Are You, Mr.?

  프로이트를 통해 무의식이 발견된 이후 심리학은 많은 발전을 거듭해오고 있다. 보통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이 세상에는 크고 작은 정신병에 걸린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결과도 도출해냈다. 보통의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지만 말이다. 정신병적 증상이 없는 사람들을 찾기 어려운 이 시대에 내면에 있는 나의 하이든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자아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이 보통의 사람이란 주제와 연결이 된다. 결국 우리는 보통의 사람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지만 보이지 않고 제시되지 않은 이 논리에 모두 정신병적 증상 속에 들어가 버린 셈이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찾기 위해서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무작정 내 안에 있는 하이든을 만나기 위해 정처 없이 떠돌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요술 램프라도 찾아서 발견해달라고 소원을 빌어야 하는 것일까?

 

  [알라딘]을 통해 우리가 얻은 해답은 간단하다. 우선 외적 환경에 집중하지 말고, 내 내면을 집중해서 보자. 그리고 그 내면의 나를 발견해서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보자. 

 

  그동안 외면해서 미안하다고.

 

  그렇다고 너무 적극적으로 화해해서 동조한다면 나는 중립적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이든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럼 균형감 있는 나를 찾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한 가면을 쓰고 있기도 해야 한다. 그 가면이 가면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내가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 결과 알라딘은 진짜 왕자가 되었으니까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누구인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우리는 순수하게 도전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더 이상 인스타와 카톡의 프사로 나를 소개하는 방법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순수하게 고민하고 순수하게 대화한다면 결국 이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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