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 담긴 이야기/최근 본 영화 감상

지하실에 갇힌 아버지를 구할 수 있을까 - [기생충]

제시안 2019. 7. 5.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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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스포가 포함되었습니다.

 

0. 들어가는 글

  어릴 적 동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불합리하고 나아질 것 없는 현실에서 마치 알라딘처럼 요술램프만 얻으면 모든 것들이 나아질 것 같은... 시궁창과 같은 현실과 말도 안 되게 장미빛으로 치장된 꿈 사이에 우리는 서 있었다. 꿈이 있냐 물어보면서, 찾아보면서, 다양한 성공 공식들을 이야기하면서, 여러 성공한 이들의 자랑을 들으며 그들의 성공과 부와 명예를 선망하면서, 그렇게 살아왔다. 현실이란 것이 내게 진흙이냐, 갯벌이냐에 따라 벗어나서 툭툭 털어버리면 되는 이들과 벗어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빠져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의 차이는 너무 컸다. 

 

  난 어디에 서 있을까?

 

  동화에서 나오는 램프도, 유리구두도, 도깨비 방망이도 없는 이 현실에서 난 아스팔트에 서 있나, 진흙에 서 있나, 아니면 갯벌에서 언제 바다가 몰려올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나? 멀리서 보면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다양하게 색칠된 이 생들이 가까이서 보면 피와 눈물이 뒤범벅되어 잔인하도록 이기적인 면모를 보인다. 서울의 야경은 그래서 더 아름다운 것일까?

 

  인생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섞인 것은 무엇이든 아름답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반지하에서 막 올라온 기생충이냐, 아니면 지하에 갇힌 기생충이냐, 아니면... 이 기생충들을 모두 밟고 서 있는 부자냐. 한국의 현실을 기막힌 서사로 풀어낸 봉준호 감독에게 찬사를 보낸다.

 

1. 집

 

※ 이미지 출처 - 구글

  이제 한국에서 집을 사는 이는 몇 부류가 되지 않는다. 벼락 부자가 된 경우이거나, 원래 돈이 많았거나, 아니면 부모님 덕을 좀 봤거나. 집을 사기 위해 노력하는 여러 인생들은 집과 집을 전전하며 살아가고, 그나마 전세로 산다는 것에 만족해한다. 월세로 사는 이들이나 좁은 단칸방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내 집은커녕 전세도 꿈만 같은 이야기다. 이런 나라에서 사그라들지 않는 내 집 마련의 꿈. 영화 [기생충]에서 집은 이 영화의 모든 갈등을 이끌어가는 핵심으로 자리 잡는다.

 

  영화에는 "반지하집", "마당이 있는 넓은 집", 마당이 있는 집 속에 "숨겨진 지하실" 이렇게 세 공간이 등장한다.

 

  "반지하집"은 "마당이 있는 넓은 집"에서 벗어나 있다. 같은 경제적 여건들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소위 달동네에 있는 것이다. 이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마당이 있는 넓은 집"은 꿈꿀 수 없다. 애당초 다가갈 수 없는 공간에 있는 것이다. 이곳에 가려면 누군가의 추천이나 학벌 등이 필요하다. "반지하집"에서의 삶은 가난이 일상이고, 미래도 계획도 없는 삶이다. 

 

  "마당이 있는 넓은 집"은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집이다. 유명한 건축가가 지은 이 집은, 가정부와 운전기사가 있는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 회사의 사장이고, 흔한 라면에도 한우를 넣어서 먹는 집이다. 그리고 내 집에서 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이다. 

 

  "숨겨진 지하실"은 정작 집주인들이 모르는 곳에 있다. 숨어 살 수 있고, 주인이 자면 이들이 먹던 음식을 조금 떼어 생계를 유지한다. 혹 밤에 등장하게 되어 집주인과 마주하게 되면 범죄자로 취급받을 수 있고, 때론 귀신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이 "숨겨진 지하실"에 사는 사람이다. 이들은 집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큰데 이유는 이들이 있어서 자신들이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빛을 보지 않아도 괜찮다. 집주인이 없을 때 "마당이 있는 넓은 집"은 이들의 소유가 되니까.

 

  영화 속 인물들은 이 집들 중 한 곳을 소유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이들은 그 소유한 곳에 맞는 생각과 생활을 해 나간다. 인물들의 생각과 생활을 규정하는 만큼 이들이 향유하는 공간은 이들의 개성과 삶의 모습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다. 

 

  "반지하집" 사람들에게는 패배 의식과 가난이, "마당이 있는 넓은 집" 사람들에게는 지배 의식과 부유함이, "숨겨진 지하실" 사람들에게는 비굴함과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모습이 비춰진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들이 바로 공간과 공간이 주는 환경의 영향으로 얻어진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캐릭터를 형성하고, 공간이 주는 이미지를 통해 관객들에게 캐릭터의 성격을 설명해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를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하며, 마지막으로 공간을 통해 인물들의 갈등 역시 쉽게 공감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2. 낮은 자들의 생존 싸움

※ 이미지 출처 - 구글

  공간으로 분류된 인물들은 서로 다른 욕망을 품고 있는다. "반지하집" 사람들에게는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아 어떻게든 부를 쟁취하고자 노력한다. "마당이 넓은 집" 사람들에게는 현재 닫힌 자신들의 공간에서 느껴지는 무료함에 사로잡혀있다. "숨겨진 지하실" 사람들에게는 이곳에서의 삶을 통해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목표와 이런 삶을 살게 해 준 주인집 사람들에게 고마움이 있다. 

 

  "반지하집" 사람들과 "숨겨진 지하실" 사람들은 집주인을 통해 얻는 부를 놓치고 싶지 않다. 이들은 사회 안전망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고 냉혹한 생존 경제에 몰려있는 사람들이다. 부의 기회를 잡고자 노력했지만 이들의 노력은 오히려 사회 안전망에서 더 빠르게 벗어나도록 유도하였다. 대표적으로 "대만 카스테라"로 망한 송강호와 박명훈은 서로 공유하는 경험이 있다. 이 사건으로 망한 수많은 소점포 사장님 중 대표적인 사람들인 것이다. 송강호는 백수가 되어 그나마 반지하 집에서 머물 수 있었으나, 박명훈은 무리하게 사채를 끌어 써서 빚쟁이들에게 쫓겨다니게 되었다. 망한 사람들의 두 가지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첫 갈등은 바로 이들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부를 쥐고 있는 이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자신들의 비밀이 있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 서로를 죽이고자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싸움에서 "마당이 넓은 집" 사람들은 제3자의 자리에 앉아 큰 피해를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을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반지하집"과 "숨겨진 지하실" 사람들의 최우선 생존전략이 된다. 

 

  그러나 이정은의 죽음으로 "숨겨진 지하실" 사람인 박명훈은 분노하게 되었고, 이에 "마당이 넓은 집"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일잔치에 난입하여 복수의 칼을 휘두른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생일잔치에는 "반지하집" 사람들이 참석해서 함께 즐기고 있었다. 복수의 칼은 "반지하집" 사람들에게 휘둘러졌지만, 이로 인해서 "마당이 넓은 집"으로 진출하게 될 기회는 사라지게 되고, 이들의 민낯이 드러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3. 냄새

  영화 [기생충]에서는 계급적 차이를 만드는 결정적인 단어가 등장한다. 바로 냄새다. 이는 "반지하집" 사람들이 모두 한 가족임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단어이면서, 동시에 이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신분적 제약을 드러내 준다. 정작 이들은 아무리 자기들의 냄새를 맡아도 "마당 넓은 집" 사람들이 고약하다고 느끼는 그 냄새를 맡지 못한다. 이는 생활을 통해 베인 냄새이고, 자신들의 환경이 준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냄새로 인해 "반지하집"의 아버지인 송강호는 내재되어 있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발시키고 만다. 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질 수 없는 삶의 상징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마당 넓은 집"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을 하고, 이들의 부를 분배받으며 더 나은 삶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해도 서로 다른 경계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지워질 수 없는 냄새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고, 계속 "반지하집" 사람으로 남아야 한다.

 

  송강호는 이에 분노하고 만다. 이는 인디언으로 분장한 것으로 상징이 된다. 자신의 땅에서 쫓겨나 정작 침범한 이들에 의해 낯선 이방인이 되어 밀려나야 했던 이들의 모습으로 말이다. 인디언처럼 가지고 있던 자신의 땅은 무엇일까? 송강호의 가족들이 아닐까? 부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노력했지만 이 땅들은 침범당하였고, 지키지 못한 채 낯선 이방인이 되어야 했던 것. 이에 분노한 것이 아닐까?

 

4. 기생충들이 사는 나라

 

※ 이미지 출처 - 구글

  한국의 자화상이 담긴 영화 [기생충]. 이 속에는 우리들의 삶이 녹아있다. TV와 영화 속 주인공들을 보며 환상에 사로잡히고, 일확천금을 꿈꾸며 로또를 긁고, 칼퇴 후 맥주 한 캔을 그리며 야근 수당을 신청하는 우리들의 모습 말이다. 그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칼을 휘두르고 있다. 그는 내 동료였고, 친구였으며, 내 동업자인 사람 말이다. 어떻든 나는 주인집에서 주는 음식과 돈을 받아 잘 살면 되기 때문에 이를 빼앗으려는 사람들은 모두 내 적이 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가진 것이 너무 없으면 겨우 얻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게 된다.

 

  부를 모든 사람들에게 분배하지 않는 것. 그것은 결국 지배계층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된다. 조금 가진 그것을 지키기 위한 사람들의 싸움은 지배계층으로 향하지 않고 서로에게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대화의 노력은 서로의 약점을 들추고 그것으로 밀어내고자 하는 욕심과 싸움으로 사라지게 된다. 결국 다툼과 언쟁과 살인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영화 시종 감싸고 있는 불안한 기운은 언제든 주인이 나타나면 숨어야 하고 이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집에서 도망 나와야 하는 송강호의 가족들을 통해 극에 치닫는다. 즉,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생계의 유리 바닥을 지키기 위해 이들은 살얼음을 걷듯 조심스럽게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줄 수 없는 것일까?

 

  다시 집을 찾아 아버지를 구하겠다는 주인공 최우식의 편지는 그런 의미에서 감독의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가 갇힌 저 지하실을 발견해야 하고, 그 지하실 문을 열기 위해서는 우리가 마당 넓은 집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그럼 그 집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최우식의 편지가 이루어질지, 아니면 불가능할지는 관객들의 마음속에 담겼을 것이다. 하지만 봉준호는 이를 환상적으로 그림으로 우리에게 부탁을 하고 있다.

 

  더 이상 기생충이 되지 말자고.

 

  마지막 질문. 

 

  우리는 서로 화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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