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이야기

[#성경] 1일 - 빛이 있으라 하시매(창 1장 ~ 5장)

제시안 2024. 3. 2.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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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는 글

 

어렸을 적에 동화를 즐겨 읽었다. 왕자와 공주의 이야기, 선녀와 나무꾼의 사연,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 등등. 호랑이가 담배를 피기도 하고, 산신령과 도깨비가 착한 이들에게 선물을 주던 그 이야기들 말이다. 

 

당시 막 할머니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신앙심에 가족들은 크게 반발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예수쟁이라고, 교회 가면 돈이 나오냐며 구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신앙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할머니는 내게 성경을 권했다. 같이 읽자고. 할머니를 따라 교회를 가고, 고모할머니를 따라 성당도 가고, 시골 할머니를 따라 절도 가야 했던 엄마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있었으리라... 나는 이야기가 좋았고, 또 성경이란 책에도 관심이 있어서 냉큼 좋다고 했다. 그때가 7살이었던가? 하지만 아무리 책을 좋아하는 나라도 창세기는 어려운 말이 가득했다. 

 

시간이 흘러 이젠 할머니가 성경을 권하지도 않고, 나 역시 스스로의 믿음 정도는 챙길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말씀을 배우고 성경 통독은 어렵지 않게 해내는 때가 되어 돌아보니 그때가 참 소중하게 다가온다. 그때 처음 성경을 접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비록 할머니는 많이 편찮으셔서 오늘내일하시지만 그 기억은 어느 때보다 소중하다. 

 

새해가 되어 통독을 다시 시작하였다. 성경을 펼쳐보며 드는 여러 생각들을 글로 옮겨보려고 한다. 그러면 추억도 되고, 나중에 내가 보더라도 여러 도움이 되겠지. 작은 감상들을 이 글들에 담아보련다.

 

1. 처음 말씀을 만나다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 1:2~3, 개역한글

 

처음 글을 쓰겠다고 마음 먹었던 계기가 생각난다. 그저 TV에서 하는 만화에 푹 빠져 그 이야기를 나도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 끄적였던 것이 시작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지나 이제는 글밥을 먹고 있는 중이지만, 처음 계기는 소박했다. 그 당시에 내가 쓰던 것은 "판타지"라는 장르의 글이었다. 막 인터넷 통신이 발달해서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같은 서비스들이 등장했던 때였다. 이 공간에 사람들이 글을 쓰고 서로 보며 좋아했는데 그것들이 책으로도 나오기 시작했다. 

 

판타지라고 하면 서양이나 일본의 소설에서만 볼 수 있었던 장르라 생각했는데 그걸 우리도 쓸 수 있다니. 그 자체가 신기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도 소설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에 이 책, 저 책 더듬어 보고 글도 써보고 그랬다. 여러 가지 공부도 하면서 말이다. 아무래도 신화와 전설을 다루는 장르다 보니 여러 가지 신화적 소재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그중에는 여러 종교의 경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저 소재를 얻고 세계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해 경서들도 보면 좋다고 생각했다. 마침 대학교에서 만난 선배들도 이런 생각에 크게 동의해 줬다. 한 선배는 실제로 "우파니샤드"를 읽으며 그 소감을 전해주기도 했다. 시로 등단해서 문단에서 활발히 활약하는 선배는 군종병으로 가 남는 시간에 성경을 본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동기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난 개인적으로 성경에 특히 더 관심이 있었다. 집에 성경도 있었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신 할머니의 영향도 있었다. 교회를 데리고 가시기도 하고, 기도도 해보라 하시고. 아빠는 이런 할머니의 등쌀에 학을 떼고 있었다. 할머니에 대해 애처로운 마음이 있었던 나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결과적으로 아빠와 할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스스로 신앙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이런 집 분위기 뿐만 아니라 공부하며 필요성을 느끼기도 했다. 서양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조금씩 접하게 된다. 조금씩이라도 보면 볼수록 호기심이 생겼다. 이걸 알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도 들고.

 

그렇지만 선뜻 성경을 사 보거나 성경을 펴 보지는 못했다. 당초 신앙에 관심조차 없었던 나는 완전한 프로이트주의자였으니까. 오직 내 스트레스에만 집중해서 그것을 건강하게 해소하는데만 관심이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다 한 사람과 인연이 되어 성경 말씀을 배우게 되었다. 그때는 집도 어렵고, 나도 어렵고, 모든 것을 잃고 망한 때였다. 어쩌면 그런 모든 것을 잃은 상황일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절망과 고통의 늪에 빠진 그 순간 말이다.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은 기간동안 말씀 하나하나를 배워가면서 몰랐던 것을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졌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다 배우고 나니 철학자들의 말들도 너무 쉽게 이해가 되었고 그들의 한계도 분명히 보였다. 시대를 초월한 말씀과 지혜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말씀을 배우기 전과 나를 비교해 본다면... 아마 인문학자인 나와 신앙인인 나로 구분이 될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데 기준이 되는 것이 그 전에는 인문학에서 배우고 익힌 내용들이었다. 아직도 내게는 이 모습들이 남아있다. 인문학에서 인간은 그저 동물에 불과하다. 어떤 인문학자들은 이런 내 정의에 '젊은 친구가 수준이 낮구만'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우리는 이상적 인간에 대해 논의하고 이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지만 언제나 정치에 이용되고 나락에 빠지는 결과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정글과 같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에 대해서만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신앙인인 나는 그 이상을 뛰어넘는다. 이 세대와 다음 세대를 고민하게 되고 우리가 왜 서로의 욕망에만 집중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준 자체를 인문학을 넘어 신학으로 옮기게 되니 많은 생각과 감정에 여유가 생겼다. 개인적으론 미래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창 1:2~3)의 구절과 같았다. 혼란하고, 어둠이 가득한 내게 하나님이 빛을 허락하심으로 내 삶에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빛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다. 진리를 앎으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짐처럼 짊어지고 있던 욕심들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삶은 한결 가벼워지고 한결 행복함으로 여유로 가득 채워나갈 수 있게 되었다. 

 

2. 두 나무의 비밀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 2:9, 개역한글

 

성경 말씀을 배우면서 들었던 생각은 참 이치가 맞고 쉽구나 라는 것이다. 사실 자명한 이치는 너무나 쉽다. 그러나 지키는 것이 어렵다. 그렇기에 살아가며 여러 수행 아닌 수행을 하게 된다. 실제로 나는 성경 속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을 갖추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그것이 쉽지는 않았다. 쉽게 화를 내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빛 되지 못한 모습을 보이거나 하는 것들은 나 스스로도 항상 아쉽고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특히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 욕심으로 많은 것들을 이뤘지만 또 많은 것들을 놓치기도 했다. 인간관계도 어색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내 편안한 이미지에 한껏 다가와 마음도 열고 친하게 지내려고 하지만 때때로 내가 나도 모르게 비꼬는 말을 하게 되면 점점 나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면서도 나 스스로가 가진 한계를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되며 참 말씀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다시금 느끼게 된다. 

 

사람의 욕심은 결국 죄를 낳고, 사망으로 이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있다.(약 1:15) 욕심의 시작은 어디서 일까? 그것은 창세기 때 아담과 하와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생명나무와 선악나무를 두셨고, 아담에게는 선악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고 언약하셨다. 아담은 하나님과 직접 언약을 해서 이 약속을 굳게 지키고 있었으나 하와가 문제였다. 뱀은 이런 하와를 꼬드겼고 뱀의 꼬임에 넘어간 하와는 곧 아담도 꼬셔 결과적으로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게 만들었다. 그 결과 세상에는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우리는 죄 가운데 살아가게 되었다. 

 

에덴동산에는 왜 선악나무가 있었을까? 이 부분을 가지고 오랜 시간 신학자들은 고민을 해왔다. 최근에도 많은 이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여러 추측과 가설들을 내고 있다. 그중에선 선악과가 하나님이 숨겨두신 지혜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선악과가 대체 무엇인지 모르기에 벌어지는 해프닝이 아닐까 한다.

 

성경을 가만 보고 있으면 이 두 나무의 비밀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에덴동산에는 왜 생명나무와 선악나무가 있었는가? 선악나무 실과는 왜 먹으면 안 되는 것인가? 하나님은 선악나무를 에덴동산에 두신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 에덴동산에 선악나무를 둔 것인가? 여러 질문들이 생각난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약 900년의 삶을 살고 이 세상을 떠났다. 성경의 말씀대로 사망이 그를 찾아온 것이다. 만약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아담을 볼 수 있을까? 궁금하다.

 

성경을 다 읽으면 마지막 계시록 22장에 생명나무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선악나무에 대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선악나무는 창세기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 이 선악나무는 이 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참 신기하다. 그리고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는 계시록 22장에 다시 등장한다. 그럼 이 계시록이 이루어지는 때에 생명나무를 볼 수 있다는 의미인가?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생명나무와 선악나무는 이 성경책의 모든 내용을 관통하는 비밀이 아닐 수 없다. 이 비밀을 알아야 우리는 성경을 보는 이유와 목적, 성경이 쓰인 이유까지도 알 수 있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니(딤후 3:16) 성경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닐까? 

 

 

3. 잃어버린 에덴동산, 우리는 다시 가야한다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 3:23~24, 개역한글

 

에덴동산이 어디 있는가에 대해선 여러 추측들이 있다. 실제 중동지역이 아니냐 하는 의견도 있고 그렇다. 성경을 근거로 한 고고학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에덴동산이 어디냐 하는 것보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곳을 갈 수 없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범죄 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다. 그리고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이들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셨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고자 역사하고 계신다. 예수님이 바로 그 증거 아닌가? 예수님은 아무런 죄 없이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떠나가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고자 하신다는 증거가 아닌가?

 

그럼 생각해 보면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 아닐까? 계시록에선 하나님의 낙원이라는 구절이 나온다.(계 2:7) 하나님의 낙원에는 생명나무가 있는데 계시록 22장에 보니 그곳은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곳이라고 한다. 천국. 바로 이곳이 천국 아닐까?

 

하지만 이 천국이 지금 이 세계에는 없다. 지금도 세계는 핵전쟁의 위험과 고물가, 그리고 다양한 갈등으로 신음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갈등은 서로가 서로의 욕심을 이기지 못해 거짓을 만들고, 죽이고, 자신만 살겠다고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는데서 시작된 것이다. 모든 갈등의 시작은 결국 욕심이다. 욕심은 결국 죄를 만들었고, 이 죄로 인해 우리는 사망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이런 세계에 천국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성경에는 다시 오시는 천국에 대한 이야기와 하나님도 다시 오신다고 이야기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직접 이야기도 하시고(계 1:8), 하늘의 천사들도 이것을 노래한다.(계 4:8) 하나님이 다시 이 세상에 오신다고 하는 것을 봐선 이 세상에는 현재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지금 이와 같은 혼란이 발생하고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천국으로 가야 한다. 그곳은 애통하는 것도, 애곡 하는 것도 없고 다시 눈물 흘릴 일도 없는 곳이라 한다. 상상하기도 어려운 행복이 가득한 곳이라 한다.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약속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이고, 이것을 그저 전해줄 뿐이다.(계 21:4)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천국으로 가서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

 

불가능한가? 사실 사람의 계산으로는 불가능하다. 인문학자인 내게 이 일에 대해 물어보면 단연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그렇지만 신앙인인 내게 물어보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가능하다고. 어쩌면 이후의 글들은 이 가능한 것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기록될 것 같다. 그리고 개인적인 감상이나 글을 보며 드는 여러 생각들을 기록하게 되지 않을까 한다. 그렇지만 그 글들 속에서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가능하다. 예수님도 그래서 십자가를 지셨던 것 아닐까. 가능하니까. 

 

4. 나가는 글

성경을 읽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렇지만 이 글 속에서 어떤 작은 인사이트라도 얻을 수 있다면 난 그것으로 만족한다. 작은 생각들이 있고, 그 생각들을 서로 공유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발전해 나갈 것이니까.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나무가 있는 잃어버린 에덴동산으로 향할 것이다. 성경에 그 길이 나와있다. 

 

여러 이야기가 생각난다면 비밀 댓글을 작성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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